책제목주홍글씨
작성자 김**
작성일 2020/04/05
조회수 916
- 출판사
- 푸른나무
- 글쓴이
-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 성장별점
- 832
주홍글씨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하여
17세기 엄격한 청교도 사회였던 아메리카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주홍글씨는 Adultery라는 죄악의 상징으로 주홍 글씨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가야 하는 편견으로 인한 심각한 인권 침해에 시달리는 헤스터 프린과 용기가 없어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마음 속의 주홍글씨 죄의 굴레 속에 시달리며 나날이 죽어가는 딤즈데일 목사, 눈먼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영혼과 삶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로저 칠링워스를 주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이 3명의 인물과 관련된 나의,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보고 싶다.
첫째, 혐오이다.
도덕적 잣대와 윤리적 처벌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아기를 안고 처형대 위에서 흘러간 헤스터의 3시간은 또 다른 차별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것을 정당화하던 3시간과 그 이후의 수 없는 낙인의 시간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혐오와 배척을 바탕으로 한 차별임이 분명하다. 적대감으로 변질된 정의감은 여과 없이 쏟아진 우리들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사람들의 가치 기준은 대부분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어 그 기준에서 판단하고 그 기준에서 동맹을 맺는다. COVID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상황을 들여다보자. 현대판 주홍글씨로 확진자들에게 온갖 기피와 편견으로 내뱉어진 말들은 정신적 폭력을 가하고 있다. 판데믹 상황에서 최소한의 기본 수칙을 이행하는 것은 평소보다 구속력 있는 의무감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특정 개인의 실책을 붙들어 많은 이들이 과도한 공격을 하는 것은 인간적 가치를 철저하게 무시당한 헤스터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현대판 주홍글씨는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공격해올 수 있다. 엄숙주의와 도덕주의의 가면 안에서 자행되는 허위와 위선은 범죄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인간적인 가치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둘째, 위선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이것을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사실을 왜곡해 자신의 갈등을 없애는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합리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추악함은 같은 사건이라도 자신의 입장에 맞춘 해석으로 ‘라쇼몽 현상’을 낳고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으며 자신이 한 선택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결과가 당연하다는 당위성을 역설하게 만든다. 로저 칠링워스는 자신의 부인이었던 헤스터의 불륜에 눈이 멀어 오로지 그 불륜의 상대를 찾아 처절하게 복수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는 자신이 악마가 되어 가는 것을 모른 체 딤즈데일 목사의 영혼이 희망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기뻐한다. 더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자신의 내면을 가꿀 수 있었던 시간은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자 뿌리뽑힌 잡초처럼 그의 몸에서의 모든 생명도 내몰고 만다. 고상한 척, 박식한 척, 남을 위하는 척, 사려 깊은 척 했지만 그의 속에는 집요하게 상대를 헤칠 예리한 칼을 갈고 있었을 뿐. 그의 위선은 안타깝다.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상황 논리는 결국 해방 이후 친일파들의 행적을 끔찍하게 용인하는 궤변으로 흘렀고, 미투 운동의 피해자들을 두려움으로 신음하게 했으며 세월호 사건 때는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304명의 가슴 아픈 생명이 이지러졌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셋째, 부끄러움이다.
관중은 <관자>에서 나라는 버티는 기둥은 네 개가 있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부러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개가 부러지면 위태롭고 세 개가 부러지면 쓰러지며 네 개가 모두 부러지면 나라를 잃는다고 하였다. 그 네 개의 기둥에서 첫째는 예, 둘째는 정의, 셋째는 검소함 그리고 마지막 기둥은 부끄러움이다. 세 개의 다리들이 부러지면 처방이 존재하나 마지막 네 번째 부끄러움의 기둥이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다고 하였다. 목사라는 직분이 갖는 체면 때문에 헤스터를 손가락질하던 마을 사람들의 손길, 눈빛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움은 불안과 공포를 동반해 슬픔과 좌절의 나락으로 그를 이끈다. 감동과 감화로 가득찬 그의 설교에 마을 사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언행과 삶의 불일치로 부조화로 부끄러움은 긴장 속에 영혼을 갉아 먹는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는 삶을 더 아름답게 한다. 진실의 소리에 귀 기울여 부끄러움을 대면할 용기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 변하지 않는 본질을 찾는 눈이 될 것이다.
<인생을 대하는 여덟 단어>라는 책을 쓴 저자 박웅현은 ‘자존’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해 지적받고 그것을 가져야한다 교육받아 왔어요.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중심점을 바깥이 놓고 눈치 보며 바깥을 살핍니다. 자존은 중심점을 안에 찍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올바른 자존은 자만도 자위도 독선도 아니다. 남과 나를 편 가르고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내가 아닌 건강한 우리로 나아갈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땅끝마을 해남 대흥사 절터 침계루의 기둥은 흔히 한국의 절에서 보는 기둥뿌리 지름이 기둥머리 지름보다 크게 만들어 세우는 민흘림 기법을 쓰지 않고 휘면 휜 대로 나뭇가지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각자의 모습을 살려서 지었다고 한다. 깎고 다듬어져 전부 똑같은 모양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 생긴 모습 그대로 각자의 삶을 사는 그리고 그것을 천태만상의 삶으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응원하는 사회의 다양성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이끌지 않을까?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하여
17세기 엄격한 청교도 사회였던 아메리카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주홍글씨는 Adultery라는 죄악의 상징으로 주홍 글씨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가야 하는 편견으로 인한 심각한 인권 침해에 시달리는 헤스터 프린과 용기가 없어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마음 속의 주홍글씨 죄의 굴레 속에 시달리며 나날이 죽어가는 딤즈데일 목사, 눈먼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영혼과 삶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로저 칠링워스를 주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이 3명의 인물과 관련된 나의,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보고 싶다.
첫째, 혐오이다.
도덕적 잣대와 윤리적 처벌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아기를 안고 처형대 위에서 흘러간 헤스터의 3시간은 또 다른 차별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것을 정당화하던 3시간과 그 이후의 수 없는 낙인의 시간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혐오와 배척을 바탕으로 한 차별임이 분명하다. 적대감으로 변질된 정의감은 여과 없이 쏟아진 우리들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사람들의 가치 기준은 대부분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어 그 기준에서 판단하고 그 기준에서 동맹을 맺는다. COVID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상황을 들여다보자. 현대판 주홍글씨로 확진자들에게 온갖 기피와 편견으로 내뱉어진 말들은 정신적 폭력을 가하고 있다. 판데믹 상황에서 최소한의 기본 수칙을 이행하는 것은 평소보다 구속력 있는 의무감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특정 개인의 실책을 붙들어 많은 이들이 과도한 공격을 하는 것은 인간적 가치를 철저하게 무시당한 헤스터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현대판 주홍글씨는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공격해올 수 있다. 엄숙주의와 도덕주의의 가면 안에서 자행되는 허위와 위선은 범죄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인간적인 가치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둘째, 위선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이것을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사실을 왜곡해 자신의 갈등을 없애는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합리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추악함은 같은 사건이라도 자신의 입장에 맞춘 해석으로 ‘라쇼몽 현상’을 낳고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으며 자신이 한 선택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결과가 당연하다는 당위성을 역설하게 만든다. 로저 칠링워스는 자신의 부인이었던 헤스터의 불륜에 눈이 멀어 오로지 그 불륜의 상대를 찾아 처절하게 복수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는 자신이 악마가 되어 가는 것을 모른 체 딤즈데일 목사의 영혼이 희망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기뻐한다. 더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자신의 내면을 가꿀 수 있었던 시간은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자 뿌리뽑힌 잡초처럼 그의 몸에서의 모든 생명도 내몰고 만다. 고상한 척, 박식한 척, 남을 위하는 척, 사려 깊은 척 했지만 그의 속에는 집요하게 상대를 헤칠 예리한 칼을 갈고 있었을 뿐. 그의 위선은 안타깝다.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상황 논리는 결국 해방 이후 친일파들의 행적을 끔찍하게 용인하는 궤변으로 흘렀고, 미투 운동의 피해자들을 두려움으로 신음하게 했으며 세월호 사건 때는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304명의 가슴 아픈 생명이 이지러졌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셋째, 부끄러움이다.
관중은 <관자>에서 나라는 버티는 기둥은 네 개가 있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부러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개가 부러지면 위태롭고 세 개가 부러지면 쓰러지며 네 개가 모두 부러지면 나라를 잃는다고 하였다. 그 네 개의 기둥에서 첫째는 예, 둘째는 정의, 셋째는 검소함 그리고 마지막 기둥은 부끄러움이다. 세 개의 다리들이 부러지면 처방이 존재하나 마지막 네 번째 부끄러움의 기둥이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다고 하였다. 목사라는 직분이 갖는 체면 때문에 헤스터를 손가락질하던 마을 사람들의 손길, 눈빛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움은 불안과 공포를 동반해 슬픔과 좌절의 나락으로 그를 이끈다. 감동과 감화로 가득찬 그의 설교에 마을 사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언행과 삶의 불일치로 부조화로 부끄러움은 긴장 속에 영혼을 갉아 먹는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는 삶을 더 아름답게 한다. 진실의 소리에 귀 기울여 부끄러움을 대면할 용기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 변하지 않는 본질을 찾는 눈이 될 것이다.
<인생을 대하는 여덟 단어>라는 책을 쓴 저자 박웅현은 ‘자존’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해 지적받고 그것을 가져야한다 교육받아 왔어요.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중심점을 바깥이 놓고 눈치 보며 바깥을 살핍니다. 자존은 중심점을 안에 찍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올바른 자존은 자만도 자위도 독선도 아니다. 남과 나를 편 가르고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내가 아닌 건강한 우리로 나아갈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땅끝마을 해남 대흥사 절터 침계루의 기둥은 흔히 한국의 절에서 보는 기둥뿌리 지름이 기둥머리 지름보다 크게 만들어 세우는 민흘림 기법을 쓰지 않고 휘면 휜 대로 나뭇가지 부분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각자의 모습을 살려서 지었다고 한다. 깎고 다듬어져 전부 똑같은 모양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 생긴 모습 그대로 각자의 삶을 사는 그리고 그것을 천태만상의 삶으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응원하는 사회의 다양성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이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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