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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내용
책제목장벽의 시대
작성자 김**
작성일 2020/04/29
조회수 183
초연결의 시대, 장벽은 왜 더 무성히 돋아날까?
[서평] 팀 마샬, 장벽의 시대, 이병철 옮김, 바다출판사(2020년)

세계는 서로 종횡으로 뒤엉킨 그물이고, 우리는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여권 없이도 전 세계를 누비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명확히 알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러스에 대한 대응 방식은 연결을 차단하고 장벽을 쌓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 위기상황에서 세계 각국이 전체주의적 감시체제와 민족주의적 고립이냐, 아니면 시민적 역량강화와 글로벌 연대냐의 선택지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장벽은 불쾌하지만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 자율과 연대의 가치는 좋지만 코앞에 닥친 위험에 맞서 왠지 장벽만큼 미덥지 못하다.
빈곤, 자연재해, 테러라는 바이러스가 닥쳤을 때, 세계 각국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팀 마샬의 <장벽의 시대>이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지리에서 시작되었다.”

팀 마샬의 저서 <지리의 힘(Prisoners of Geography)>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리의 힘’으로 번역되었지만, 영어 원제는 ‘지리의 포로’이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 발 디딘 세계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지리의 포로다. 이는 간디가 사회적 장벽인 카스트제도를 옹호하고, 트럼프가 자국의 이익 수호를 위해 장벽을 쌓는 것에 대해 그 땅에 발 딛지 않은 자로서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리의 힘>이 인간을 제약하는 강, 산, 사막, 호수, 바다 등의 천연장벽을 다뤘다면, 신간 <장벽의 시대>는 세계 각국이 난민, 테러리즘, 종교와 민족 분규 등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인공장벽을 다룬다. 물론 물리적 장벽뿐 아니라 소통을 가로막는, 카스트제도, 인종주의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 장벽도 포함한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자살’ 연구를 통해 사회 저변의 모든 문제를 읽어냈듯이, 팀 마샬은 21세기 초연결 사회에 돋아나고 있는 ‘장벽’을 통해 세계 각국이 직면한 사회문제와 그들이 추구하는 발전전략을 정확하게 간파한다.

장벽의 세계화
세계 각국에 이렇게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21세기가 ‘장벽의 시대’라는 엄혹한 현실을 책을 읽으며 누차 깨닫는다.
모든 장벽의 두목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만리장성과 인터넷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황금방패에서 미국의 이민 배척 정책으로 멕시코 국경에 들어선 1,600km 장벽,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에워싼 분리 장벽,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경 250km의 장벽, 중동 각국의 수도에 설치된 테러 방지용 콘크리트 방폭벽,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요르단, 시리아, 예멘 국경 각각의 장벽들,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 4,000km에 설치된 철조망과 장벽, 파키스탄과 이란 국경의 장벽, 아프리카에 과거 식민주의가 임의로 그어놓은 ‘국경선’이란 이름의 부족과 문화를 갈라놓는 장벽, 2,700km 모로코 장벽, 통합의 기치를 내걸었던 EU 회원국인 그리스와 터키, 헝가리와 세르비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노르웨이와 러시아 국경의 장벽들, EU 탈퇴로 잉글랜드가 주변국에 세운 심리적 장벽, 북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의 충돌 방지용 벨파스트 장벽, 그리고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3.8선이란 이름의 장벽까지….
‘타자’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물리적 분리를 위한 새로운 장벽을 세우고 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움츠리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안위를 지키려 몸을 사리고, 이익을 지키려 장벽을 높인다.
팀 마샬은 자신이 두 발로 탐험한 장벽을 생생하게 묘사할 뿐, 장벽의 모양이 서로 다르듯, 각기 저마다의 이유로 세워진 장벽의 순기능과 폐해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한다. 어쩔 수 없는 영국 저널리스트의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이 느껴지는 대목도 없지는 않다.  

장벽의 이유
장벽은 우리가 ‘차이’를 해결하지 못함을 증명한다. 그 ‘차이’는 이념, 민족, 인종, 종교, 계급 등 국가마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장벽은 불쾌하지만 종종 효과가 있다. 테러를 막아주거나 대량의 난민 유입을 단번에 차단한다. 그러나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속담의 가치를 실현하진 못한다. 장벽이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이지만, 어쩔 수 없는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초연결의 시대, 정보는 빠르게 유통되고 욕망은 웃자라기 쉽다. 조금이라도 경제 여건이 나은 곳을 찾아 저소득 국가의 노동자들은 국경을 넘는다. 미얀마 사람은 방글라데시로 흘러들고, 방글라데시 사람은 인도 국경을 넘는다. 미국과 유럽에서 볼 수 있는 불법 이민, 난민 문제 또한 대부분 경제적 빈부 격차로 발생한다. 초연결의 시대는 지역간 경제 불균형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며,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은 더 큰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한다. 정보는 소통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진영의 논리와 신념을 선별적으로 강화한다.  
처음에는 낯선 ‘타자’에 대해 거주, 의료, 교육 서비스 등의 페널티를 주는 것으로 문턱을 두다가, 유입되는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며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점점 문턱을 높이다보니 어느덧 문턱은 장벽이 되어 있는 현실이다. 물론 종교적 분쟁, 테러, 전쟁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의 장벽 또한 다수를 차지한다. 장벽은 차단의 기능을 무엇보다 쉽고 가시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지금도 충돌이 빚어지는 지점들에서 끊임없이 돋아나고 있다.

장벽 허물기, 가능한가?
작가 데이비드 굿하트는 2017년 저서 <어딘가로의 길>에서 “세계를 어디서나(anywhere) 보는 사람과 세계를 어딘가에서(somewhere) 보는 사람 사이의” 주요한 차이로 특징지었다. (중략) 굿하트는 영국 인구의 최대 25퍼센트가 ‘어디서나 보는 사람들’이고, 약 50퍼센트는 ‘어딘가에서 보는 사람들’이며, 나머지가 중간자들이라고 말한다.  315~316쪽

세계를 어디서나(anywhere) 보는 사람은 인류의 형제애, 공동번영 등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25퍼센트에 불과하다. 어딘가에서(somewhere) 보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지리의 포로로 자신의 신념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다수이다. 그만큼 장벽 허물기는 어려운 과제다.
팀 마샬은 국경선은 ‘사상 최악의 발명품’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과 국가의 실재를 인정해야 하며, 끊임없는 자원 경쟁이 벌어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부분이며, 민족주의는 이런 감정에 기초한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동물이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하고, 믿을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지만, 여전히 이 세계의 피조물이고,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345쪽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은 한때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대 교역국을 윽박지르며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다. 그렇게 장벽을 낮추며 세계화를 추구하던 미국의 국가전략은 자국 이익 중심의 고립주의로 선회한 듯하다.
미국은 세계화로부터 철수함으로써 입을 잠재적 손실을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강국이다. 미국은 장벽으로 상징되는 고립주의가 다른 나라에게 어떤 피해를 미칠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팀 마샬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타협(compromise)’이라고 하는데, 타협은 손님을 환영하는 주인의 책임과 배려가 더 커져야 가능하다. 민주, 평등, 자유,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지닌 선진국이 먼저 다가오는 손님에 대한 두려움의 장벽을 낮춰야, 역사의 궤적이 다시 ‘통합’을 향해 구부러질 가능성 또한 생겨나지 않을까.
빈곤, 자연재해, 테러라는 바이러스에 장벽을 세우는 것은 현상 유지에 불과하다. 백신 개발을 통해 근본적인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서는 차이를 끌어안는 연대가 필요하다. ‘장벽의 시대’는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는 돌궐  톤유쿠크 비문의 말을 되새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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