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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내용
책제목서, 인간의 징검다리
작성자 김**
작성일 2020/07/19
조회수 49
서하라, 나와 남의 마음 사이 ‘등호(=)’를 건설하라!
[서평] 이향준, <서(恕), 인간의 징검다리>, 마농지(2020년)

모든 사상에는 백그라운드 센스, 배경감각이 있다. 불교는 삶의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간주하고, 해탈과 열반을 제시한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는 억압의 ‘답답함’을 벗어난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그럼 공맹으로 대표되는 유가사상의 배경감각은 무엇일까?
철학자 이향준은 유가의 배경감각으로 ‘따뜻함’을 뽑는다. 혼란스러운 천하에 인(仁), 의(義), 예(禮)로써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유가는 왠지 ‘어지러움이나 혼란’이 어울릴 것 같은데,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철학자는 왜 약간 변방의 감각처럼 느껴지는 ‘온(溫)’을 유가의 배경감각으로 꺼내드는 것일까?
아무리 뜨거운 만남도, 지적 열망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식어가기 마련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따스했던 인정도 차갑게 변하기 십상이다. 이때 식어가는 것을 다시 따뜻하게 데우는 것, 그게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배려, 베풂의 마음이 아닐까.
철학자 이향준은 나와 남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 ‘서(恕)’에 주목해 2009년 <서(恕): 도덕적 상상력>를 시작으로 10년간 총 10편의 논문을 써왔고, 이를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바로 《서(恕), 인간의 징검다리》이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 23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중략) 이와 유사한 가르침은 《성경》에서도 발견된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29쪽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아함경》 가운데 하나인 <바뉴다라경>에서는 “누가 나를 죽이려 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죽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중략) 이슬람 학자 이븐 아라비(Ibn Arabi)는 “너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곧 율법의 전부이니, 나머지는 주석일 뿐이다.”  10쪽

인간 공동체, 거의 모든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메시지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내 행동의 준칙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다. 인간이라는 동질성을 전제하더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나이고, 근본적으로 내가 아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공자의 도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충서(忠恕)’에 등장하는 서(恕)는 같을 여(如)에, 마음 심(心)이 더해진 글자다. 서는 나의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과 같게 하는,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에 등호(=)를 건설해내야 하는, 서로 다른 욕망의 급류에 징검다리를 놓아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지난한 언명이다.

왜 ‘~하지 마라’ 부정형인가?

칸트는 정언명법에서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고 말한다. 도덕적 황금률은 인간 행위를 긍정형으로 제시한다. 칸트의 비판을 받는 공자의 언명은 왜 그럼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을까?  
왕부지(王夫之)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게 하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는 서의 긍정어법은 여기서 그쳐야 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라”는 해석을 경계한다.

“사람들의 외양과 말투, 행동이 모두 비슷하다고 해서 그들의 욕망도 똑같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13쪽

내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공자는 ‘베풀지 마라’는 부정형으로, 행위가 발생해 생기는 부작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식, 즉 ‘베풀지 않음의 비행위’로 서를 규정한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푼다.”고 했을 때, 내가 김치찌개를 좋아해 친구에게 김치찌개를 대접했다고 가정해보자. 친구도 김치찌개를 좋아하면 다행이지만, 싫어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저마다 다르기에 언제든 어긋날 수 있다. 부정형은 행위가 발생하지 않아 부작용도 없지만, 긍정형의 언명은 행위의 발생으로 인한 부작용의 위험을 내재한다.

서는 용서인가, 자기성찰의 헤아림인가?

저자는 공자, 맹자, 순자, 주희, 왕부지, 정약용에 나타난 서의 의미에 대해 탐구한다. 공자의 서를 도덕적 상상력의 유학적 형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가 가져오는 잔인함에 맞서는 대처 방식, 삶의 전략으로 파악한다.
맹자의 서는 타인의 고통에 측은지심으로 대표되는 슬픔을 도덕적 계기로 삼으라고 권고한다. 반면 순자는 슬픔과 같은 감정이 아닌 공리성의 계산과 같은 또 다른 인지능력을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약용의 서인데, 유교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이 만났을 때 서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서의 용례를 용서(容恕)와 추서(推恕)로 구분했다. 그는 이 용어를 비대칭적으로 이해했다. 즉 그는 명백하게 용서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추서에 긍정적이었다.”  218쪽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학의 서를 모두 용서의 의미로 이해하고 성서를 번역한다. 천주교도이기 전에 유학자였던 정약용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서를 촌(忖), 탁(度), 양(量), 추(推) 등과 유사한 헤아림의 의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기수련의 보편적 통로로 이해했다.
저자는 이를 유학의 인문주의, 자조주의(自助主義) 전통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신 없이도 인간 삶의 가치를 충분히 구축할 수 있다는 유학의 지적 전통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잘못은 스스로의 성찰로 고치는 것이지 초월자의 용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거다. 또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서 신이 용서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있었을 것이며, 이런 사상은 후에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이어졌다고 파악한다.

거울뉴런? 죄수의 밥그릇?

“나와 신체적으로 단절된 타인의 마음을 느끼고, 공감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의 신체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333쪽

특정 움직임을 행할 때나 다른 개체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활동하는 신경세포인 거울뉴런은 타인의 고통이 내 인식의 거울에 비쳐, 그 고통에 공감하는, 도덕성의 기초가 된다. 거울뉴런은 공감의 생물학적 기초이면서 역지사지, 추기급인(推己及人), 혈구지도(絜矩之道)를 가능하게 하는 저울이고 곱자인 것이다.
저자는 또 ‘서의 수열(數列)’ 개념을 제시하여 서가 순환하는 방식, 무한의 서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오디세이아》와 《레 미제라블》에 두 번째 혹은 n번째 서의 가능성과 곤란함을 예로 든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서를 베풀고, 도덕적 회계(moral account)의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떠남으로써 베풂을 받은 사람이 생면부지의 다른 사람에게 서를 베푸는, 무한의 서를 가능하게 한다.
저자가 유가의 배경감각으로 제시한 따뜻함, 온(溫)은 죄수를 뜻하는 수(囚)와 그릇을 뜻하는 명(皿)이 결합된 글자다. ‘죄수의 밥그릇’이다. 추운 감옥 안에서 홀로 굶주리고 있는 죄수에게 건네지는 따뜻한 밥그릇은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의 도덕적 상상력이 발휘되어 거울에 감옥 안 사람의 마음이 비출 때, 도덕성의 저울 위에서 두 마음의 균형이 맞을 때 작동 가능할 것이다.

서는 개별 존재인 내가 타자를 넘어 ‘우리’로 나아가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통로, 인간의 징검다리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가 보여주듯, 서는 무한의 서로 순환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한 신체적으로 단절된 인간이 저마다 다른 욕망을 지닌 타자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음(心)을 같게(如) 하라는 서(恕), 등호(=)의 미션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평생을 걸고 도전해야 할 미션이 아닐까. 그래야 등호는 아니더라도 근사기호(≒)에나마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사람이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행동 원칙을 한마디로 이르면 무엇입니까?” 라는 자공의 질문에 공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서(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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