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동물농장
작성자 김**
작성일 2020/04/01
조회수 33,889
- 출판사
- 민음사
- 글쓴이
- 조지오웰
- 성장별점
- 22005
-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동물 농장을 읽고
누구나 존경했던 지혜로운 돼지 메이저 영감의 마지막 유언이었고, 처음이자 끝으로 농장의 동물들에게 희망적인 미래를 심어주었던 '영국의 동물들' 환상은 말 그대로 허상으로 끝났다.
존스 씨의 매너 농장에서 일에 얽매여 비참하고 고달픈 노예같았던 동물들은 목숨을 겨우 연명할 만큼의 음식으로 버티며 오직 쓸모로만 그들의 존재 가치가 결정되어 늘그막엔 결국 잔인한 도살장에서만 끝마칠 뿐인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고통 받고 있었다. 동물의 권리를 앗아가는 인간을 적으로 규정하고 오로지 정의를 위해 자유과 평등을 기치로 모든 네 발 달린 동물들의 연대를 꿈꾸게 했던 메이저는 꿈꾸듯 떠났다.
꿈이란 그런 걸까? 현실의 비참함과 막막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동물들은 두려워 숨죽이기만 했던 인간 존스를 향한 공포를 초월하고, 반란을 통해 그를 몰아낸 뒤 농장을 자신들의 손에 넣는다. 하지만 어떠한 꿈도 이상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추진력을 달지 못하면 꺾여버린 날개처럼 허무한 울림이 되고 말듯 결국 그들이 가는 방향은 제자리걸음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보기 좋게 내세운 7계명의 희망은 인간에 대한 적개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힘써 싸워 얻어낸 자유, 평등의 모든 고귀한 가치는 이분법적 세계관 아래 빛을 바래갔다.
1. 두 발로 걷는 자는 적이다.
2. 네발로 걷는 자와 날개를 가진 자는 모두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목적도 없고 명분도 없이 의미 없는 구호가 되어버린 반란의 7계명은 동물들의 머리 속에 절대 선과 절대 악만으로 세상을 구분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적 아니면 동지라는 편견에 가득 찬 가치관 아래 어떤 이유였는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적어도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점차 사라진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논증하는 것에 서툴러 이런 저런 선동가들의 외침에 허무하게 부화뇌동하는 동물들의 모습은 이미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게 한다. 왜 학생은 아직 덜 된 시민이 아니라 이미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교육받아야 하는지, ‘민주시민 육성’에 대해 교사로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안이 먼저 말라 시간도 결국 적의 편으로 흘렀던” 남한산성에서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나폴레옹’이 ‘스노볼’을 몰아내던 장면은 어떤가?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풍차를 도입하자는 스노볼의 제안은 동물을 위한 것이었지 적어도 본인의 명예나 권력 독점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그렇게 바라보는 나폴레옹의 눈은 이미 인간 존스와 다름없이 부패해 가고 있다는 반증이었을 것이고. 근위 부대 개들과 돼지 선동가들을 통해 많은 동물들을 억압하고 세뇌시키며 그 위에 군림해 간 나폴레옹도 결국 인간 존스와 다를 바가 없었고 끝도 없이 허랑방탕해져 갔다.
'어떤 동물도 [너무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이유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허울뿐이었던 7계명도 결국 조작되어 간다. 그리하여 온갖 압제에 대항한 혁명 표어였던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도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로 변질된 웃지 못 할 현실은 동물들로부터 모든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천천히 나폴레옹의 독재에, 전체주의적 사상에 잠식당하던 그들은 결국 무엇이 무엇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최태성’씨가 ‘역사의 쓸모’에서 말했던 항시 점검하고 자문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가 예송을 싸늘하게 바라보듯 우리의 쟁점도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문제는 아닌지 점검할 것! 갈등은 당연한 것이고 뜨거움도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뜨거움이 빗나간 열정이 아닌지 늘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우리를 잠식하게 될지 깨끗이 잊혀 사라진 것이 될지 두렵기 때문이다.
비단 정치인뿐이랴 마는 정치인들에게 ‘믿음’은 생명과도 같다. 나폴레옹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 많은 정치인들의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 민심을 살피겠노라 외치던 자신의 정치적 신념, 가치를 위해 끝까지 신의를 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희대의 악당 이아고는 오셀로의 내면에 잠자던 질투를 부풀려 터지게 만들고 아내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시키며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허나 이아고만 악당인가? 오셀로는 무엇이었나? 그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아고의 거짓을 느꼈을테면서 외면한 채 자신의 모든 행동의 명분을 이아고의 정직성으로만 돌려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기망해버렸던 그는 과연 무죄라 할 수 있는가? 자제력을 잃고 광분해 질주하는 파도 같았던 그의 변해가던 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파도를 막을 방파제도 없이 질주의 종착역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자신과 주변을 기만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
동물농장은 조지 오웰이 전체주의적 사회를 우화하여 비판한 소설이다. 차르 독재 속 굶주려 가던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정치 싸움 아래 트로츠키가 추방되고 암살당한 사건, 결국 악명 높은 스탈린의 독재 속 두려움에 떨던 러시아 사회 모습을 빗대어 표현한 소설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는 이 소설이 비단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의 타락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세계정세 속 힘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기존의 강자에 도전하며 벌어지는 국지적 전쟁 속에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와 같이 경쟁하는 자연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물질 만능이란 가치 아래 도구적 개인으로 전락시켰음에도 문화적 교양인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보수와 진보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건전한 발전을 이루어가야 할 사회를 잃어버린 민주주의 현 주소는 아닐까?
수저 계급론을 펼치며 비관하고 자조하는 여러 눈물과 한숨 섞인 글들, 정치·사회면 뉴스마다 달리는 댓글과 관련 미디어에 넘쳐나는 여러 혐오 발언들, 그 속에 담긴 차별에 찬성하는 사회 모습을 보면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며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피땀 흘려 일궈낸 민주주의 기치는 ‘존엄’의 평등 아니었을까? 동물농장의 7계명처럼 변형되고 잊혀져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사회를 위해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사회로 부족한 민주주의의 정치체계를 민주적 인성으로 극복해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폴 발레리의 유명한 명언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 좋겠다.
-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동물 농장을 읽고
누구나 존경했던 지혜로운 돼지 메이저 영감의 마지막 유언이었고, 처음이자 끝으로 농장의 동물들에게 희망적인 미래를 심어주었던 '영국의 동물들' 환상은 말 그대로 허상으로 끝났다.
존스 씨의 매너 농장에서 일에 얽매여 비참하고 고달픈 노예같았던 동물들은 목숨을 겨우 연명할 만큼의 음식으로 버티며 오직 쓸모로만 그들의 존재 가치가 결정되어 늘그막엔 결국 잔인한 도살장에서만 끝마칠 뿐인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고통 받고 있었다. 동물의 권리를 앗아가는 인간을 적으로 규정하고 오로지 정의를 위해 자유과 평등을 기치로 모든 네 발 달린 동물들의 연대를 꿈꾸게 했던 메이저는 꿈꾸듯 떠났다.
꿈이란 그런 걸까? 현실의 비참함과 막막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동물들은 두려워 숨죽이기만 했던 인간 존스를 향한 공포를 초월하고, 반란을 통해 그를 몰아낸 뒤 농장을 자신들의 손에 넣는다. 하지만 어떠한 꿈도 이상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추진력을 달지 못하면 꺾여버린 날개처럼 허무한 울림이 되고 말듯 결국 그들이 가는 방향은 제자리걸음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보기 좋게 내세운 7계명의 희망은 인간에 대한 적개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힘써 싸워 얻어낸 자유, 평등의 모든 고귀한 가치는 이분법적 세계관 아래 빛을 바래갔다.
1. 두 발로 걷는 자는 적이다.
2. 네발로 걷는 자와 날개를 가진 자는 모두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목적도 없고 명분도 없이 의미 없는 구호가 되어버린 반란의 7계명은 동물들의 머리 속에 절대 선과 절대 악만으로 세상을 구분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적 아니면 동지라는 편견에 가득 찬 가치관 아래 어떤 이유였는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적어도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점차 사라진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논증하는 것에 서툴러 이런 저런 선동가들의 외침에 허무하게 부화뇌동하는 동물들의 모습은 이미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게 한다. 왜 학생은 아직 덜 된 시민이 아니라 이미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교육받아야 하는지, ‘민주시민 육성’에 대해 교사로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안이 먼저 말라 시간도 결국 적의 편으로 흘렀던” 남한산성에서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나폴레옹’이 ‘스노볼’을 몰아내던 장면은 어떤가?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풍차를 도입하자는 스노볼의 제안은 동물을 위한 것이었지 적어도 본인의 명예나 권력 독점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그렇게 바라보는 나폴레옹의 눈은 이미 인간 존스와 다름없이 부패해 가고 있다는 반증이었을 것이고. 근위 부대 개들과 돼지 선동가들을 통해 많은 동물들을 억압하고 세뇌시키며 그 위에 군림해 간 나폴레옹도 결국 인간 존스와 다를 바가 없었고 끝도 없이 허랑방탕해져 갔다.
'어떤 동물도 [너무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이유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허울뿐이었던 7계명도 결국 조작되어 간다. 그리하여 온갖 압제에 대항한 혁명 표어였던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도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로 변질된 웃지 못 할 현실은 동물들로부터 모든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천천히 나폴레옹의 독재에, 전체주의적 사상에 잠식당하던 그들은 결국 무엇이 무엇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최태성’씨가 ‘역사의 쓸모’에서 말했던 항시 점검하고 자문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가 예송을 싸늘하게 바라보듯 우리의 쟁점도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문제는 아닌지 점검할 것! 갈등은 당연한 것이고 뜨거움도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뜨거움이 빗나간 열정이 아닌지 늘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우리를 잠식하게 될지 깨끗이 잊혀 사라진 것이 될지 두렵기 때문이다.
비단 정치인뿐이랴 마는 정치인들에게 ‘믿음’은 생명과도 같다. 나폴레옹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 많은 정치인들의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 민심을 살피겠노라 외치던 자신의 정치적 신념, 가치를 위해 끝까지 신의를 져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희대의 악당 이아고는 오셀로의 내면에 잠자던 질투를 부풀려 터지게 만들고 아내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시키며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허나 이아고만 악당인가? 오셀로는 무엇이었나? 그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아고의 거짓을 느꼈을테면서 외면한 채 자신의 모든 행동의 명분을 이아고의 정직성으로만 돌려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기망해버렸던 그는 과연 무죄라 할 수 있는가? 자제력을 잃고 광분해 질주하는 파도 같았던 그의 변해가던 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파도를 막을 방파제도 없이 질주의 종착역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자신과 주변을 기만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
동물농장은 조지 오웰이 전체주의적 사회를 우화하여 비판한 소설이다. 차르 독재 속 굶주려 가던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정치 싸움 아래 트로츠키가 추방되고 암살당한 사건, 결국 악명 높은 스탈린의 독재 속 두려움에 떨던 러시아 사회 모습을 빗대어 표현한 소설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는 이 소설이 비단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의 타락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세계정세 속 힘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기존의 강자에 도전하며 벌어지는 국지적 전쟁 속에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와 같이 경쟁하는 자연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물질 만능이란 가치 아래 도구적 개인으로 전락시켰음에도 문화적 교양인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보수와 진보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건전한 발전을 이루어가야 할 사회를 잃어버린 민주주의 현 주소는 아닐까?
수저 계급론을 펼치며 비관하고 자조하는 여러 눈물과 한숨 섞인 글들, 정치·사회면 뉴스마다 달리는 댓글과 관련 미디어에 넘쳐나는 여러 혐오 발언들, 그 속에 담긴 차별에 찬성하는 사회 모습을 보면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며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피땀 흘려 일궈낸 민주주의 기치는 ‘존엄’의 평등 아니었을까? 동물농장의 7계명처럼 변형되고 잊혀져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사회를 위해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사회로 부족한 민주주의의 정치체계를 민주적 인성으로 극복해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폴 발레리의 유명한 명언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 좋겠다.
-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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