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독서감상평
책제목소지
작성자 이**
작성일 2024/03/17
조회수 193
-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 글쓴이
- 이창동
- 읽은쪽수
- 300
- 공감별점
- 30
서. '소설가' 이창동
이창동이라는 이름은 한국 사회, 그리고 그걸 넘어서 세계에 알려져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 감독을 꼽을 때 마다 꼭 언급되는 인물중 한 명이다. <박하 사탕>, <밀양>, <버닝>, <시> 등등. 그의 영화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현 시점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 까지 도달한 감독중 한 명이며 그에 걸맞게 두터운 팬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영화 감독' 이창동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창동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창동 '감독'의 첫 영화는 1997년 <초록 물고기>이고 이창동 '작가'의 첫 소설은 1983년 <전리>이다. '작가' 이창동은 '감독' 이창동보다 무려 14년이나 먼저 대중들에게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2024년이 된 지금 그의 첫 소설이 나온지 40년이 넘어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그의 소설들은 서서히 잊혀졌고 그가 거의 소설을 쓰지 않은 2000년 이후에 태어난 나는 감독으로서의 이창동의 모습만 알고 있었다.
어느날 무슨 책을 읽어볼까 하고 책 판매 사이트를 뒤적거리던 나의 눈에 들어온 '이창동 소설집'이라는 단어는 나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창동이라는 이름 석자 만으로도 나는 강한 흥미를 느꼈고, 문학과 지성사의 이 소설집 <소지>를 읽지 안을 수 없었다. <버닝> 각본집을 읽은 뒤부터 나는 그것을 사야만 하는 운명에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구매와 배송, 짧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나는 마침내 이 <소지>라는 소설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소설집에 실려있는 첫 번째 소설인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를 읽는 순간 처음 든 생각은 '이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가?'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읽은 책의 양에 비해서 이해하는 능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난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 자체는 막히는 부분 없이 쉽게 쉽게 읽혔고 나는 최면에 걸린 듯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이 소설들이 나에게 읽는 내내 쉴 새 없이 중얼거렸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것들이 나에게 이야기 했던 것은 과거에 관한 것이였고 분단에 관한 것이였으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한국적이었고, 작가의 시선은 뒷면의 해설이 설명하듯이 성숙했다.
그리하여 이 소설집은 나에 가슴 속에 어쩐지 뜨끈하게 응어리 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이 소설들에 좀 더 깊게 파고들어 그 한국적이고 성숙한 것을 이야기 하지 않고는 참을 수 가 없다. 하지만 너무 길게 쓰기에는 나의 필력은 눈물 나게 처참한 관계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작품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해보록 하겠다.
본. <끈>, 끊고 싶지 않았으나 끊어버리고 싶어졌고, 끊은 뒤에는 다시 잇고 싶게 된 것.
이 소설은 나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가 중심이 되어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소설 속 '나'는 아내가 경찰서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과거를 회상한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선을 보러 다니지만 어머니는 여러가지 핑계로 선을 파토낸다. 그리고 그렇게 선을 보는 족족 트집을 잡아서 파토내던 어머니는 어째서인지 가장 못나 보이는 여자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어 했고 나는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사건건 아내를 못살게 굴지 못해서 안달이였고 나와 아내가 신혼 여행을 가는 것 조차 방해한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 나는 어쩌면 어머니가 일부로 내가 아내에게 정을 느끼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집중하게 하려고 못난 여자를 소개 시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느날, 어머니는 아내의 삼촌이 빨갱이라는 사실로 아내에 대한 욕을 늘어놓고 내가 화를 내자 집을 나가 버린다.
중간 중간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섞여있던 회상은 그렇게 끝이난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경찰서를 나오면서 피곤에 겨워 눈을 감는다. 눈을 감자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어머니를 찾아서 다시 데리러 오리라고 결심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좋든 싫든 우리는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다. 마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이. 그리고 이 <끈>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연결은 나와 어머니의 연결이다. 소설에는 아내와 어머니, 아내와 아내의 삼촌등 갈등 상황을 발생 시키는 수많은 연결이 등장하지만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던 연결은 아마도 나와 어머니의 연결일 것이다.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소설의 제목처럼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질겨서 끊기 힘든 끈으로. 하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이 끈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 속의 나와 어머니처럼 다투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리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끈을 끊는 과정을 거친다. 사춘기를 거치고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어느정도 끈을 끊거나, 혹은 끈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몇년 전까지 끈을 철저히 끊어버리고 싶어 어줍잖게 발악하며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방황은 지금도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영원히 끈을 붙들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끈을 끊는 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의 모습은 끈을 다시 이으려고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앞서 끈을 끊는 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었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내가 끈을 다시 이으려고 하는 것은 유년으로 퇴행하려 한다는 것일까?
반은 맞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내가 어머니와의 끈을 다시 이으려는 것은 어머니와의 유년기를 회상하고 난 뒤였다. 그것을 봤을때 나의 행동은 어느정도 유년기의 기억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그런 관점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이것은 유년기로 돌아가려는 행위인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매우 어른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대개 성장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속에서 간혹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끊지 말아야할 것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끊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애써 무시한다. 소설속의 어머니가 나가는 것을 내버려둔 나의 행동은 끊어서는 안되는 끈을 끊어버린 것이고, 어머니를 찾으려는 것은 단순히 유년에 대한 향수의 영향 뿐만이 아니라 이성을 되찾고 과거의 잘못을 되집으며 끊어선 안되었던 것을 다시 이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는 끈을 이으려는 나의 행동은 그 어떤 행동보다도 어른스러운 것이다.
결. <소지>
두서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이지 글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내가 다시 이것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장황해서, 그리고 부끄러워서 이걸 읽는 나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다.
이런 읽기 힘든 내 글과는 다르게 이창동 작가의 작품은 정말로 쉽게 읽힌다. 그리고 쉽게 읽힌 것에 비해서 많은 것을 남겨놓는다. 그 남겨 놓은 것을 사유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것 만큼 쉬운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빙빙, 길게도 돌아왔지만 결론은 이것이다. 이 책은 정말로 훌륭한 책이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을 정말 진심으로 추천한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혹시라도 내가 이 책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면 오늘의 내가 쓴 이 글이 나를 다시 이 책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이창동이라는 이름은 한국 사회, 그리고 그걸 넘어서 세계에 알려져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 감독을 꼽을 때 마다 꼭 언급되는 인물중 한 명이다. <박하 사탕>, <밀양>, <버닝>, <시> 등등. 그의 영화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현 시점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 까지 도달한 감독중 한 명이며 그에 걸맞게 두터운 팬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영화 감독' 이창동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창동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창동 '감독'의 첫 영화는 1997년 <초록 물고기>이고 이창동 '작가'의 첫 소설은 1983년 <전리>이다. '작가' 이창동은 '감독' 이창동보다 무려 14년이나 먼저 대중들에게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2024년이 된 지금 그의 첫 소설이 나온지 40년이 넘어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그의 소설들은 서서히 잊혀졌고 그가 거의 소설을 쓰지 않은 2000년 이후에 태어난 나는 감독으로서의 이창동의 모습만 알고 있었다.
어느날 무슨 책을 읽어볼까 하고 책 판매 사이트를 뒤적거리던 나의 눈에 들어온 '이창동 소설집'이라는 단어는 나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창동이라는 이름 석자 만으로도 나는 강한 흥미를 느꼈고, 문학과 지성사의 이 소설집 <소지>를 읽지 안을 수 없었다. <버닝> 각본집을 읽은 뒤부터 나는 그것을 사야만 하는 운명에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구매와 배송, 짧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나는 마침내 이 <소지>라는 소설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소설집에 실려있는 첫 번째 소설인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를 읽는 순간 처음 든 생각은 '이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가?'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읽은 책의 양에 비해서 이해하는 능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난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 자체는 막히는 부분 없이 쉽게 쉽게 읽혔고 나는 최면에 걸린 듯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이 소설들이 나에게 읽는 내내 쉴 새 없이 중얼거렸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것들이 나에게 이야기 했던 것은 과거에 관한 것이였고 분단에 관한 것이였으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한국적이었고, 작가의 시선은 뒷면의 해설이 설명하듯이 성숙했다.
그리하여 이 소설집은 나에 가슴 속에 어쩐지 뜨끈하게 응어리 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이 소설들에 좀 더 깊게 파고들어 그 한국적이고 성숙한 것을 이야기 하지 않고는 참을 수 가 없다. 하지만 너무 길게 쓰기에는 나의 필력은 눈물 나게 처참한 관계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작품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해보록 하겠다.
본. <끈>, 끊고 싶지 않았으나 끊어버리고 싶어졌고, 끊은 뒤에는 다시 잇고 싶게 된 것.
이 소설은 나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가 중심이 되어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소설 속 '나'는 아내가 경찰서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과거를 회상한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선을 보러 다니지만 어머니는 여러가지 핑계로 선을 파토낸다. 그리고 그렇게 선을 보는 족족 트집을 잡아서 파토내던 어머니는 어째서인지 가장 못나 보이는 여자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어 했고 나는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사건건 아내를 못살게 굴지 못해서 안달이였고 나와 아내가 신혼 여행을 가는 것 조차 방해한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 나는 어쩌면 어머니가 일부로 내가 아내에게 정을 느끼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집중하게 하려고 못난 여자를 소개 시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느날, 어머니는 아내의 삼촌이 빨갱이라는 사실로 아내에 대한 욕을 늘어놓고 내가 화를 내자 집을 나가 버린다.
중간 중간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섞여있던 회상은 그렇게 끝이난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경찰서를 나오면서 피곤에 겨워 눈을 감는다. 눈을 감자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어머니를 찾아서 다시 데리러 오리라고 결심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좋든 싫든 우리는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다. 마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이. 그리고 이 <끈>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연결은 나와 어머니의 연결이다. 소설에는 아내와 어머니, 아내와 아내의 삼촌등 갈등 상황을 발생 시키는 수많은 연결이 등장하지만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던 연결은 아마도 나와 어머니의 연결일 것이다.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소설의 제목처럼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질겨서 끊기 힘든 끈으로. 하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이 끈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 속의 나와 어머니처럼 다투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리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끈을 끊는 과정을 거친다. 사춘기를 거치고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어느정도 끈을 끊거나, 혹은 끈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몇년 전까지 끈을 철저히 끊어버리고 싶어 어줍잖게 발악하며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방황은 지금도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영원히 끈을 붙들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끈을 끊는 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의 모습은 끈을 다시 이으려고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앞서 끈을 끊는 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었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내가 끈을 다시 이으려고 하는 것은 유년으로 퇴행하려 한다는 것일까?
반은 맞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내가 어머니와의 끈을 다시 이으려는 것은 어머니와의 유년기를 회상하고 난 뒤였다. 그것을 봤을때 나의 행동은 어느정도 유년기의 기억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그런 관점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이것은 유년기로 돌아가려는 행위인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매우 어른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대개 성장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속에서 간혹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끊지 말아야할 것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끊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애써 무시한다. 소설속의 어머니가 나가는 것을 내버려둔 나의 행동은 끊어서는 안되는 끈을 끊어버린 것이고, 어머니를 찾으려는 것은 단순히 유년에 대한 향수의 영향 뿐만이 아니라 이성을 되찾고 과거의 잘못을 되집으며 끊어선 안되었던 것을 다시 이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는 끈을 이으려는 나의 행동은 그 어떤 행동보다도 어른스러운 것이다.
결. <소지>
두서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이지 글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내가 다시 이것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장황해서, 그리고 부끄러워서 이걸 읽는 나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다.
이런 읽기 힘든 내 글과는 다르게 이창동 작가의 작품은 정말로 쉽게 읽힌다. 그리고 쉽게 읽힌 것에 비해서 많은 것을 남겨놓는다. 그 남겨 놓은 것을 사유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것 만큼 쉬운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빙빙, 길게도 돌아왔지만 결론은 이것이다. 이 책은 정말로 훌륭한 책이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을 정말 진심으로 추천한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혹시라도 내가 이 책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면 오늘의 내가 쓴 이 글이 나를 다시 이 책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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